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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 소식지][발제문 공유] 국가보안법 세미나 발제문 <전쟁정치> 3부

1/2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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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담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실천적 세미나>의 발제문 중 하나인 <전쟁정치>를 공유합니다. 본 발제문은 세미나에 참여한 황다본 회원이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의 2013년작 <<전쟁정치: 한국정치의 메커니즘과 국가폭력>>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3부 정의와 평화
발제자: 황다본

7
장 정의를 바로 세우는길
- 국가폭력에 맞선 의인들
권중희와 박기서 개인이 안두희에게 ‘정의봉’을 휘두르게 된 것은 한국의 역대 정권, 검찰과 사법부가 정의를 세우는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돌출적이었지만, 우리사회 정의의 실종, 즉 국가범죄를 단죄할 수 없거나 단죄를 포기한 현실이 숨어 있다. 법이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해 생겨난 피해자 혹은 정의로운 개인의 사적응징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인권운동은 집단적으로 국가폭력에 맞선 투쟁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 목회자, 문인, 언론인, 교수, 인권 변호사 등 많은 각계각층 인사들이 폭력에 맞섰다. 1979년 부마항쟁의 주역들 역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에서 총을 들었던 시민군들이야 말로 국가폭력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이다. 반인륜적인 공수부대의 살인적 진압과 학살을 보고 격분하고, 모른 체하고 도망갈 수 없었던 마음, 정당한 항쟁세력을 폭도로 몰아간 계엄사령관의 담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다”는 언론의 허위 보도를 접하고 도저히 인간으로서 침묵할 수 없었던 것이 5·18 민중항쟁의 배경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것에 대한 분노, 공동체를 지켜야겠다는 책임의식이 이들이 대항할 수 있게 만든 힘이었다. 국가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성스러운 행동이었다. 이미 전두환 군부세력이 정당화되지 않는 폭력세력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들의 사회, 그들의 ‘대항 국가’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공수부대가 잠시 물러갔던 짧은 기간의 자치와 공동체에 대한 자료는 명백하게 남아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광주’의 기억을 환기하려는 세력과 그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세력 간의 역사적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일종의 기억투쟁이었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광주 학살의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생존의 수치심을 집권자에 대한 증오감으로 전화시켰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세대적 수치심과 책임의식의 공감대가 만들어졌고 해방 후 우리 사회 최초의 공공의 윤리, 집단적 도덕성이 결성될 수 있었다. 이것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광주의 전국화’인 6월 항쟁이다. 90년대 이후 반폭력 저항운동은 주로 유가족과 시민사회에 의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운동이었다. 이러한 기억투쟁의 힘을 바탕으로 여러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설립될 수 있었고, 국가폭력의 진실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또한 일부는 출옥 후에도 권력에 맞서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들처럼 투쟁하지는 못했지만 직업 한계 내에서 나름대로 소신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다. 조봉암 사건 1심 재판을 맡았던 유병진 판사는 재판 석상에선 것을 반성하고 5년 형을 선고하였고, 결국 정권에 의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제주 4·3사건에서 폭력을 중단시키려 했던 장군, 보도연맹 피학살 대상자를 풀어주던 경찰 등 수많은 의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전쟁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고문을 폭로한 김근태를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인권 변론에 앞장선 조영래 변호사 등의 활약도 있었다.
현재에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대운하 사업을 폭로한 연구원 등 수많은 국가권력의 강압에 맞서 관료조직 내부의 비리를 폭로하거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공무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개개인의 힘으로 거대한 ‘전쟁정치’의 국가폭력을 멈추기에는 어렵다. 한반도 분단체제의 종식과 남북한 평화질서의 수립이 궁극적인 대안이지만. 그 이전에 한국 사회 자체가 변해야 할 점들이 있다.
 
- 가해자 처벌, 책임 묻기
한국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와 불법사찰이 계속 재발하고 인간성이 존중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1949년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 이후 이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한 번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공권력 남용은 봐주면서, 관용은 국민과 피해자에게 강요되고 있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고통 받는 이웃을 모른 체한 대다수의 동시대인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말단 경찰이나 군인도 상관의 명을 받아 인권침해를 저지른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이 있다. 침묵한 사람들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고, 직접 가해 선상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사법적 처벌을 완수하고, 국민이 선거 등을 통해 정치적 심판을 하는 등 국가범죄를 저지른 자를 알맞은 방식으로 처벌하게 된다면 미래에 인간 존엄성이 말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경찰과 군부는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지만 거창사건 관련자들을 제외하고는 재판에 회부된 사람조차 거의 없고, 광주 학살사건으로 두 전직 대통령과 나머지 6명의 지휘관들이 ‘내란죄’로 처벌을 받았지만 곧 풀려나고 두 전직 대통령은 국가 원로로 대접받아왔다. 잔혹한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은 모두 고통스런 삶을 살거나 일찍 사망했지만 이들을 고문하도록 지시하고 명령한 사람들, 그 제도와 구조에 대해 아직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단죄하지 못했다. 여전히 국민 다수는 그 고문이 특별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독일은 세분화된 방법으로 처벌을 시도하려는 의지는 컸지만 점차 처벌의 대상이나 강도도 다소 완화되었으며, 사실상 단순 가담자로 분류된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라도 처벌을 했기 때문에 독일은 다시 공화국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정의란 주고받는 것이다. 누가 내게 피해를 입혔으면, 그는 내게 배상을 해주어야 한다. 내가 남의 신세를 졌으면 그만큼 갚아야 하고, 누가 나의 가족을 죽였다면 내가 보복을 하는 것이 정의다. 그러나 이는 보복의 악순환을 일으킬 것이기에 피해자를 대신해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이 이들을 정치적 ·사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강자, 즉 권력자나 기업가가 처벌되지 않는 한 사회 정의는 기대할 수 없고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국민의 밑으로부터의 국가 파괴와 사회 파괴 행동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사회적 처벌도 중요하다. 공식 기록을 통해 인권침해의 사실을 기억하고 명예를 되찾는 것을 통해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도 개인적 형사책임과 필요하면 구상권 행사도 가능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적 보복을 공적 정의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국가범죄에 대한 불처벌은 거의 관행이 되었다. 이를 처벌할 수 있도록 공소시효가 배제되어야 국가의 형벌권 자체가 소멸되지 않고 범죄의 재연 가능성을 소멸시킬 수 있다. 기존의 형사법 이론들이 개인 간에 발생한 일탈행위에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반인도적 범죄, 즉 국가 공동체 자체 혹은 모든 구성원에게 지속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범죄나 집단살해에는 공소시효 산정에서 제외하고 적절한 법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온 사회에 지속적으로 몇 세대에 걸쳐서 지속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범죄의 처벌은 국가와 사회를 완전히 재구축해야 하는 사업이다. 권력은 특별법 등을 통해 국가범죄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피해 당사자의 개인적 권리 주장의 문제로만 국한하려 한다. 중대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려면 국민이 이것을 범죄로 인식하고, 그러한 특수 범죄에 대해서는 시간이 오래 지났더라도 엄격히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한국은 전쟁범죄나 평상시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시효를 배제하는 입법을 시도한 적이 없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과거 군사정권의 주역들이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 주요 기관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었고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등이 정치적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국가범죄는 특성상 가해세력이나 그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집권하는 동안은 제댈 처벌될 수 없다. 한국의 권력은 계속 자기사면을 반복해왔다.
체제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기존 형법상의 내란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이라는 별도의 처벌법을 만들어 이중 삼중으로 처벌하고, 또 한국전쟁기에는 학살까지 했지만 국가범죄의 처벌과 피해자 보상에 대해서는 기존 형법과 민법 조항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국가 혹은 국가기관이 저지른 대량학살, 집단적인 인권침해사건에 대해서는 관련 법 조항도 없고 기존의 개인 대 개인 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형법과 민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법 체계 아래서는 국가권력의 범죄와 권력 남용을 막기 어렵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설치되어 최근에 발생한 반인도적 범죄는 국제적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국제사회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법과 규범을 비웃는다. 그러나 각국이 우선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시효 배제 조항을 적용한다면 문제 해결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최종길 교수 사건이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사소송에서 법원이 민사상의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은 것은 약간의 진전이라 할 수 있지만 아직 한국 법원이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인색하다. 그러나 그동안 피해자와 유족이 소를 제기할 수 없던 세월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법원도 시효 종료를 주장하지는 못할뿐더러, 시민사회부터 이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법적 안정성을 주장하는 사법부 관료들의 저항을 제압하면서 시민사회의 압력으로 기존 정당과 정치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과 정책을 갖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 가해자 사과와 피해자 배상
우리 사회에서 정의의 실종은 죄를 지은 사람이 남탓을 하는 데서 기인한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가 잘못을 하고서도 부끄러워하고 바로잡기는 커녕 그것을 정당하다고 우긴다면 앞으로 그러한 일을 계속 저지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가해자의 사과와 반성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계기가 되며, 사과나 반성이 없을 때는 피해자의 정신 상처는 지속되고 사회의 통합과 복원은 어려워진다. 비록 국정 책임자가 사과하거나 가해자에게 책임을 무리고 배상하게 한 경우가 있었지만 진정한 사과의 주체는 군과 경찰이 되어야 한다. 사법부 또한 법관의 개인적 사과를 넘어 과거 폭력의 하수인 역할을 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나 반성을 한 적이 없다. 건별 기준이지만 법원이 판결문에서 사과와 반성을 밝히거나 재판부가 판결을 뒤집기도 한 사례도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이나 경찰, 사법부도 과거의 잘못을 일정 부분 정리하고 반성하는 작업을 했지만 유독 검찰만은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 오늘날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의 원인은 검찰의 무리한 권력남용과 형평성과 공정성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데에 있는데도 말이다. 군과 경찰, 사법부와 검찰 등의 개혁은 시민사회의 견제와 압박의 지속과 내부 양심세력의 조직비리나 권력남용을 고발할 수 있을 때 시작할 수 있다. 조직문화가 바뀌어야 조직 내 의인이 많이 나올 수 있고 사회 또한 의인을 조직이 처벌하더라도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폭력이나 심각한 인권침해, 부패와 비리는 공권력 행사의 영향의 직접적 당사자인 국민의 인권을 뒷전에 두고 일사불란한 조직 명령을 더 중시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굴복과 무력감, 사회적 연결고리가 상실된 상태를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경제적 궁핍은 가해자의 회유에 쉽게 포섭되거나 타협하게 한다. 심지어 모든 힘있는 세력은 인권침해사건을 확인해도 피해자 개인 단위의 보상조치로 사건을 마무리하려한다. 그러나 개인의 억울한 죽음과 부당한 처우는 결코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국가폭력이다. 죽음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는 될 수 있어도, 존재를 제거하고 부인한 것에 대한 사과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인정은 죽음을 ‘사회적으로’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이자 죽음을 기억하고 아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 정의의 질서가 바로서는 사회구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보상은 단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도구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단죄되고 공권력의 잘못에 대한 진실이 완전히 공개될 경우,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합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한다. 또한 피해자들의 피해와 고통이 사회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사회적 자원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숭고한 희생을 싼값에 팔리지 않게 하기 위해 합당한 배상을 인권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공동체 보상. 지역사회 보상, 비금전적 보상 등의 방법을 통해 연대를 강화하고 피해자들이 서로 분열, 적대 관계로 변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기억 공동체 형성을 통한 시민사회의 주체화
승자에 의해 진행된 재판은 식민지, 피지배 국민 등 희생자의 관점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 결국 그것은 사법의 정치 편향성뿐 아니라 계급성도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형사처벌이 국가의 잘못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과 그 규명 내용의 완전한 공개를 수반하지 않는 다면 과거 청산이 아닌 정치적 보복으로 판단될 여지가 많고, 인간성 말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 진상규명과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 처벌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나치 청산을 철저하게 수행함으로써 공화국 건설의 새로운 정체성 부여의 자원으로 활용한 독일과 달리 일본과 한국은 정반대의 맥락에서 ‘흘러가지 않는 과거’ 혹은 ‘현재진행형의 과거’를 말해야 한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과거 세력이 여전히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과 억울한 영혼들이 과거 청산의 부재로 현재에 붙들려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고통이자 수난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는 집단적으로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다.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이해하는 것은 거짓이며, 현재를 모르고 미래를 말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현재와 과거를 단절적으로 본다면 과거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과거는 지배자의 행동 속에 개인과 집단의 기억의 형태로 집단 정체성이 되어 살아 있는 것이다. 과거는 법, 제도, 관행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잘못된 과거가 청산 되지 않을 경우 과거의 법, 제도, 관행, 권력관계는 현재를 지배한다. 이러한 매커니즘이 청산되어야 지배구조로서의 과거를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식이 높은 집단이나 민족일수록 현대사의 범위는 더욱 확장된다. 사건으로의 과거의 역사는 이미 지나갔지만, 흐름의 기조와 내용, 원칙으로서의 과거, 즉 ‘현재 속의 과거’를 우리는 문제 삼는다. 인간성을 말살한 국가 숭배, 전쟁, 폭력, 독재, 고문, 배제, 차별 등은 현재 권력의 매커니즘, 법과 제도, 관행, 문화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집단 기억은 이러한 인간성 말살을 거부하는 정체성을 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등 반공세력이 강요하는 비인간화를 용인하거나 정당화하는 기억이 아닌 당시 학살에 대한 집단 기억이 필요한 것이다.
잊혀진다는 것은 잔인한 것이다. 공동체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있는데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집단적 지혜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쿠제가 말했듯 인간은 망각의 능력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다. 망각은 고통을 잊게 해주지만 굴종과 체념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기억은 바로 해방의 수단이라는 이야기다. 잊혀진 것을 합리화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반공세력의 강요된 기억처럼 필요한 기억은 만들어내고 불편한 기억은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려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국사 교과서를 문제 삼고 국정 교과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광복절을 건국절이라 부르려 하고, 백선엽을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부각하고, KBS가 이승만 특집을 대대적으로 편성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뉴라이트 세력의 기억 조작 작업은 일본의 과거사 지우기를 능가한다.
과거의 인간 존엄성 말살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정치세력을 지지할 수도 있게 되는데, 이는 범죄세력에 힘을 보태거나 같이 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모르는 것은 죄이다.
조작된 기억과 그것을 바탕으로 세워진 잘못된 신화를 바로잡으려면 진실의 확보와 체계적 확산이 필요하다. 교육을 통한 확산 작업은 국가폭력의 억제장치 역할을 할 수 있다. 학살, 고문, 국가테러 등 반인도적 국가범죄 사실이 규명되면 반드시 교과서에 반영해야 한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고등하교는 홀로코스트를 반드시 배운다.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가 충분히 고양된 국민 양성의 필수 코스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을 규명하는 데 그치지 말고 왜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대규모 인권침해나 학살의 가해자로 돌변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종적·이데올로기적 고정관념과 편견에 내재한 위험이 어떻게 그러한 인권침해를 가져오는지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 애도와 공감, 시민의 책임
오랜 군사정권 아래서 국가폭력의 피해자 유족들은 떳떳하게 애도할 수도, 제사도 지낼 수도 없었다. 국가는 적에 대한 애도를 엄격히 금한다. 또한 국가 혹은 집단의 요구에 과잉 적응하면서 경쟁심을 키우고 상하 관계에 연연하는 문화 속에서는 애도와 공감의 여유가 없다. 경쟁에서 타인을 짓밟고 성공해야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사회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권력과 부를 얻은 사람만을 승리자로 칭송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노동문화 속 일중독주의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들이 그러한 예이다. 이런 사회는 공격적인 업적주의와 극단적인 위계질서,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이 지배한다.
앞서 말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벌어진 부정은 시민권자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권력을 누린 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집단적 반성과 책임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에 의해 고통을 받은 사람이 고통을 호소할 경우 책임이 있는 주체가 응답해야 신뢰가 회복되고 관계가 복원된다. 이와 더불어 동시대에 살았으면서도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는 역사의 흐름에 무임승차를 한 것이기 때문에 염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자신이 얻은 것이 어디서 왔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고,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응답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국가범죄 해결은 명예회복, 보상 소송에 의존했고, 소송은 부분적 치유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상 피해자를 비롯 가족, 이웃, 회사, 동료 모두가 피해자이자 빨갱이 취급하던 가해자들이었다. 시민들은 피해자들과 함께 울고 책임 의식을 자각하도록 유도하는 정의실현 작업을 통해 피해자가 사회 구성원으로 떳떳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열어주면서 사회 관계 복원에 힘써야 한다. 애초에 폭력을 저지른 주체는 국가지만 사회폭력에 의해 공동체가 무너졌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가 더불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또는 현재 진행 중인 공권력의 남용이나 반인도적 범조에 대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 책임의식을 갖게 되면 사회가 복원될 수 있다.
법과 제도가 완비되고, 처벌이 엄격하고 피해자 배상이 충분해도 권력의 부당한 행위를 묵인하거나 지지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시민사회 일반에서 기억, 공감, 책임의식을 함양하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의식은 법과 제도, 사회운동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 국가기관의 민주화
문제가 되는 인물을 사퇴시키는 인적 청산은 보복적 성격을 지니고 단지 일시적으로 대중의 분노를 다스릴 뿐이다. 정치적 민주화와 더불어 정부기구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은 비판을 자제시키고 자유로운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국가보안법이다. 지금도 냉전·보수세력은 색깔론을 거론하면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는데, 이는 국가보안법과 남북분단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법치와 정의, 즉 법의 공정한 집행 그리고 법에 대한 존중과 양립하기 어렵다.
민주화의 일차적 과제는 국민의 통제권 밖에 있는 수사정보기관의 활동을 제한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제 시기와 해방 이후 가장 강한 연속성을 갖고 있었고, 개혁의 노력은 있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탈법적 활동과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온 상황에서 변화는 어렵다. 이들 기구를 국민적 통제 아래, 즉 예산과 가능한 활동 범위를 국회의 감시권 안에 두어야 한다. 더불어 민주화 이후 비중이 커진 경찰과 검찰의 개혁도 중요하다. 여전히 고문과 폭력 진압, 용역의 폭력 묵인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기소독점제도와 검사 동일체 원칙 등을 폐지하면서 법의 지배와 정의의 수립, 인권 보호를 바로 세워야 한다. 군대만큼이나 조직문화가 인권을 앞서는 검찰이기 때문에, 검찰의 시민적 통제를 통해 인권신장을 하고 조직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또한 군 조직도 군인의 시민으로서의 인권을 보장해야 민주화가 가능할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서 사법의 독립이 강조되어 왔지만 독재정권은 법을 통해 지배하고, 민주화 이후 지금도 견제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며 정치검찰과 정치재판의 행태를 지속하고 있다. 아직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여전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고 대자본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독재를 막기 위해 국민이 일반 재판, 헌법 재판에 직접 참여하는 배심원 제도를 더 활성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 올바름의 원칙을 세우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입기도 하고 심지어는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한다. 우리가 최소한 고통을 덜 받고 비참과 불행에 빠지지 않고 자연수명을 누릴 수 있는 정의의 기준은, 차마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지 않는 원칙, 즉 저조의 원칙의 기반에 있다. 오랜 민주화 투쟁으로 되찾은 인권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국가의 권력 남용과 대자본의 횡포를 견제해야 한다. 인민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가의 입법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권력자가 시민을 교묘하게 속이는 논리의 배후를 이해할 정도로 교육받아야 하고, 국가가 안보의 이름으로 은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미디어가 공공성을 지녀야 하고, 잘못 선출된 지도자는 탄핵되거나 교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를 최대한 다수 국민의 뜻에 의해 운영되는 공동체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세계는 법과 도덕 등 합의된 규칙이 작용하는 세계이며, 법과 도덕, 규칙을 제정하고 보증하는 정치단위가 국가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모든 공동체의 최종 목표이다. 그래서 국가의 첫째 존립 근거는 인간의 존엄성 보장이다. 인간은 생존과 자기보존이라는 본능적 욕구와 죽음과 고통을 피하는 기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적 추구 존재로서 국가로부터 자기보존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가라는 공동체를 인위적으로 결성하기 위해 자유와 권리를 양도한 것이다. 국가는 정치가 실현되는 단위이며 올바름을 기본으로 한다. 즉, 정치가 추구하는 선이 정의 실현인 것이다.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올바름은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합당한 자리에 합당한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합당한 벌과 배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편파적 혜택이나 특별한 차별이 없는 것이다. 올바름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해주는 것이며, 인민이 올바름을 행할 수 있는 참여의 기회와 행동 능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이다. 이를 무시하는 국가나 정치 공동체의 목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심지어 인간 존엄성의 관념은 조선 시대 노비에게도 적용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잠재력을 긍정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잠재력을 갈고 닦을 경제적·정치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올바름을 보장해주는 것은 권력의 제한과 법의 중립적 집행이다. 구성원의 손실과 이득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일방적 희생이나 무한한 특혜를 주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국가가 안보나 치안을 명분으로 ‘올바름’에서 현저히 이탈하는 행동을 할 경우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을 의심해야 한다. 국가가 올바름을 관철할 때 사회의 신뢰가 확보되고 구성원은 자기 일에 집중하고 노력하며 모두 제자리에 있을 수 있다. 국가가 올바름을 관철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일관되지 않은 행정 집행을 바탕으로 편법과 요령을 피우고 강자의 눈치를 보거나 속임수를 쓸 것이다. 구성원이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정치적인 존재가 되어 국가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이상적 모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나 정치 공동체의 이상을 앞당겼다. 세계대전과 패권다툼, 전 세계에서 자본의 침식은 비록 현실이나, 처음 세워진 근대국가의 기초는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죽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며, 노예 상태, 반인도적인 처우를 감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8장 국가의 재구조화 : 자유법치국가와 사회국가의 수립
- 자유법치국가와 사회국가
우리는 국가가 가장 약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까지도 보호해주고, 올바름을 실천할 수 있는 단위가 되기를 원한다. 독일에서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보장받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국가는 자유법치국가라 하고, 국가 구성원이 극단적인 경제적 고통으로부터 보호받고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국가를 사회국가라 부른다. 실제 형식적 법치를 자랑하는 상당수의 근대국가는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전쟁 상태의 안보국가나 치안국가는 자유법치국가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파시즘의 유산을 청산하고 사회복지를 확충해온 서유럽 국가들은 어느 정도 사회국가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초래한 양극화, 불평등의 모순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많은 국가가 ‘형벌국가’가 되었다. 흑인이나 하층 노동자는 감옥에 갈 확률이 높아졌다. ‘테러와의 전쟁’과 경제위기는 이민자를 비시민으로 차별받게 했고 실업자와 빈공층에 대한 국가의 보호 기능이 후퇴하면서 사회국가의 틀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의 헌법은 자유법치국가와 사회국가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그러나 전쟁정치의 시대를 살면서 자유법치는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민주화 이후 자유법치와 사회국가의 초입에 았지만 여전히 분단 속 준전쟁체제이다. 먼저 국가폭력을 끝내고 과거의 폭력을 기억하고 속죄하고 애도해야 진정한 자유법치국가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되면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빈곤층을 보호해주는 사회국가로 가는 선상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정치는 시장 위험이 아닌 안보 위험에 대응하기 때문에, 구성원은 최소한의 생명보존을 최대로 보고 자유가 제한되는 국가의 불법폭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자유법치국가의 원칙과 충돌하는 전쟁정치를 청산하지 못하면 자유법치의 정신과 기반도 확보하지 못하고, 더불어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국가의 이상은 도달하기 어렵다. 먼저 실질적 법치와 사법정의, 공정성의 최소원칙이 작동하는 자유법치가 보장되어야 사회국가로 갈 수 있다. 법치가 보장되지 않는 상태라면 전쟁정치의 상황과 같이 강자의 약자에 대한 무한대의 권력행사, 인간 존엄성의 훼손이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된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법치국가를 건설하지 못했다. 검찰과 사법부의 자기반성과 혁신이 없기 때문에 검찰 사법권력은 더 강화되고 여전히 법의 이름으로 국민을 파괴하고 있다. 분단·냉전체제 아래 한국은 비동시적인 것이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법치국가와 사회국가의 길이 동시에 모색되어야 할 상황에 있다. 자유법치는 단순히 구호와 제도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참여할 수 있는 개인과 사회적 주체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유법치가 충분히 보장되고 실천될 수 있을 때 사회국가의 이상도 실현될 수 있다.
 
- 기업국가의 전쟁정치
민주화 이후 한국의 냉전체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와 공존하였다. 치안·안보국가의 시대는 경제제일주위를 모토로 하는 기업국가, 기업사회로 대체되었는데, 과거 치안·안보국가가 보여주었던 일사불란한 충성요구, 절대적 상명하복, 정부 비판 차단, 저항하는 노동자나 철거민에 대한 가혹한 탄압 등 전쟁정치를 그대로 내장하고 있다. 신자유주희 세계화는 대자본이 국가를 앞서 주인의 역할을 하는 시대를 열었다. 과거의 권력은 사라지지 않고 구조조정, 정리해고, 경쟁의 이름으로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가고 있다. 감정노동, 유해물질 노출, 용역폭력 등 모두 자본의 폭력이고, 경찰과 검찰은 이를 못 본 체한다. 오히려 국가기관은 국민이 기업에 대해 복종하고 정의보다 효율을 창출하는 도구이길 바란다.
법은 인권보호 수단이 아니라 채찍이 되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힘으로 해결하는 국가기관이 부활하였다. 고문은 없지만 노동 현장이나 철거 현장에서의 경찰폭력은 여전하고 기업의 사설폭력까지 일어나면서 과거 독재 시절 전쟁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국가의 범법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억울한 피해자의 항변과 국가에 대한 비판은 모두 통제되고, 심지어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건다. 이는 객관적으로 민주주의, 사회복지, 안전 등 모든 지표에서 한국이 좋은 정부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제를 살리겠다’던 부정의하고 인권을 가볍게 보는 자에게 표를 던진 국민은 아프리카와 시리아에 가까운, 더 못한 정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결국 경제발전의 구호 또한 민주주의와 정의의 언칙, 법, 절차, 규범이 지켜져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정치적 차원에서는 비교적 자유법치국가에 가까이 가려 했으나 부자와 빈자에게 적용되는 법과 행정이 여전히 심각하게 편파적이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우면서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 아래 재벌에게는 면죄부를, 노동자나 자영업자 등 약자에게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법과 정의의 원칙 위에 서지 않은 채 그대로 관철되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법칙이다. 결국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최고 수준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현재 한국이 압도적으로 사회갈등, 자살, 폭력을 겪고 있는 것은 치안·안보국가의 전쟁정치 메커니즘에 더불어 민주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경쟁지상주의와 효율지상주의의 기업국가 혹은 기업사회까지 최악의 조합을 이룬 데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이나 노조 등 사회조직이 갈등의 흡수, 조정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경찰과 검찰이 모든 사회적 저항과 반대를 짓누르는 형벌국가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지표에서 한국의 갈등 지수와 고소·고발 건수가 압도적인데, 이는 힘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에서 승복과 타협이 어렵기에 소송으로 해결하려는 한국 사회를 잘 보여준다.
대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국가 경제와 대기업이 잘되면 자신도 잘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국가나 대기업으로 심각한 피해를 당한 수많은 국민들에게 국가는 존재했는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올라갔을 때를 제외하고, 한국의 국민들은 사회와 국가와 법이 진정 실체로써 존재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성찰해 보아야 한다.
 
- 전쟁정치의 극복, 남북한 평화통일과 동아시아 평화
아직 한국은 반공이 헌법 위에 존재하는 신성한 종교적 원리이거나 근대국가가 아닌 상황이다. 어떤 명분을 들이대건 사람을 고문하거나 죽일 권리를 가진 국가는 근대국가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왕조국가보다 근대 국민국가가 진보한 공동체인 것은 사실이며, 그래서 한국의 헌법에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빠져 있는 점은 개인과 사회가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면을 보여준다. 국가보안법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존재하면서, 어떤 국가보다도 가혹하게 자국민과 민족을 학살하였다. 일생을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정적, 공산당,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참혹하게 살해했고, 정치가, 사회활동가, 수많은 문화인사들이 사라졌다. 땅 덩이가 좁아 인적 자산이 중요한 한반도에 기회주의자와 출세주의자만 살아남아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었고 중요한 공직을 차지하였다. 정의가 실종된 한국에서 국민에게 자발적인 애국심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우리는 처절한 고통을 겪고 오랜 투쟁을 거쳐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민주화를 이룬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북한은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주주의와 정의는 여전히 바로서지 못했다. 전쟁이 지속되는 한 정의는 계속 굴절되고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올바름의 원칙이 국제사회에 적용되어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관철하고 다수의 약소국들이 항의하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이 1945년 일본에 핵을 사용한 같은 전범국으로서 도쿄 재판에서 전범을 처벌한다거나, 아시아에 저지른 과오를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여전히 패권국가이기에 피해국가는 저항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국가폭력의 종식, 전쟁정치의 청산 문제 역시 이러한 국제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 간의 전쟁이 없다는 전제 하에 올바름이 국가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 전쟁은 모든 목숨이 가벼워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된다. 이는 내부 구성원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미국의 불법이 약소국의 불법을 정당화하고 약소국은 자국민에게 불법을 저지른다. 그래서 국가 내 정의는 반드시 국제적 정의와 결합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전쟁체제의 종식, 즉 평화체제의 수립이 자유법치국가 건설의 기본 전제가 될 것이다. 이는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얽혀있기에 주변 강대국의 동의와 강대국에 대한 정치적 자주성을 전제로 하는 동아시아 평화질서의 수립이 수반되어야 한다. 분단은 분단 유지비용뿐만 아니라 안보 불안에서 오는 사회적 합의 기반의 취약성, 높은 수출 의존도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 불안, 대기업 몰아주기식 성장론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남북한의 평화통일이 민주주의와 정의 수립의 시작이자 잘사는 나라가 되는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국가만으로는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 국제적인 부정의가 유지되는 한, 국가 내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제적으로도 냉전의 종식, 지구 환경위기, 각종 위험은 국가안보보다 ‘인간안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옮겨놓은 지 오래다. 이제는 진정한 저의 수립을 위해 국가주의의 극복이 중요하다. 국가폭력과 개발폭력, 자본폭력은 원천과 배경은 달라도 논리와 작동 방식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것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이 논리를 극복하고 동기를 제거해야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국가안보는 소극적 가치다. 적극적 가치는 인간 존엄성의 확보, 자율성의 신장과 산회 공동체성의 확보다. 국가폭력과 불평등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빼앗고 자율성을 훼손한다.
난세를 벗어나 자유법치국가와 사회국가를 함께 달성하여 국가를 넘어서는 인류 공동체을 건설하며 태평세를 맞이하는 것이 전 인류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 감상 및 논평
2013년에 출판된 이 책은 당시 박근혜 정부까지의 전쟁정치 속의 대한민국을 역사와 다양한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촛불혁명 이후 저자 김동춘은 ‘사회학자 시대에 응답하다’라는 신간을 출판하여 가장 가까운 현대까지의 사회를 비평하고 있다. 물론 어조나 이야기 자체가 일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쉬운 내용이 아니고, 책 자체도 접근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촛불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왜 노력해도 안되는지에 대해 구조의 원인을 어렴풋이 알게 된 듯 하고, 그 구조의 뿌리는 어디에서 왔고 진정한 ‘적폐청산’을 원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를 이 책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잡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 자체를 거의 그대로 요약했고 자료들은 본 책에 달린 각주 그대로를 두고 이 요약글에서는 생략했다. 책을 구하거나 엄두를 내기에 망설여진다면 간단히 이 글을 읽고 함께 고민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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