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담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실천적 세미나>의 발제문 중 하나인 <전쟁정치>를 공유합니다. 본 발제문은 세미나에 참여한 황다본 회원이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의 2013년작 <<전쟁정치: 한국정치의 메커니즘과 국가폭력>>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전쟁정치 1부 발제자: 황다본 한국전쟁과 휴전 이후의 한국정치는 ‘전쟁정치’이다. 이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을 거의 전투 현장에서 섬멸하듯이 색출, 감시, 진압하고 법과 절차를 무시하면서 체제를 유지해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된 이유는 정전과 분단이라는 계속되는 전쟁, 그리고 사실상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있다. 1953년 이후 한반도의 정전이라는 준 전쟁상태는 바로 외부의 적, 즉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내부의 반대세력을 적으로 취급하여 그들에 대한 폭력,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를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국가의 정치, 법, 도덕의 기준을 실종시켰으며, 공권력 집행의 공정성을 무너뜨렸고,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 더 나아가 사회 내 신뢰의 문화를 실종시켰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폭격의 흔적은 권력의 집행과 사회관계 속에 스며들어와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전쟁정치의 연속에서 「전쟁정치」를 요약하고 짧은 의견을 덧붙였다. 1부 국가폭력의 풍경들 1장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 - 전체주의의 그림자, 생각의 통일성 강요 2011년 조용환 변호사가 민주당에 의해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추천되자 국회 청문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조 변호사는 “정부 발표는 신뢰하지만 확신하지는 않는다”라고 답했다. 이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필두로 반북·반공 ‘신앙 고백’을 요구한 것이다. 국가는 신처럼 강요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시책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빨갱이로 만들었다. 연평도 사격 훈련에 대한 북한의 맞공격 으름장에 대해 김무성은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는 말을 통해 정부 비판세력을 종북 좌파로 몰아붙였다. 불순, 정화라는 말은 국민들을 단일한 생각으로 획일화 시키고 국민의 충성확보를 위해 국가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깔고 있다. 이런 생각 아래 전두환은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었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까지 잡아다가 살인적 폭력을 행사했다. 당시 미국에서 백인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이 시행했던 ‘범죄와의 전쟁’ 프레임의 흐름과 비슷하다. 이러한 정화라는 말은 종교국가의 성격을 보여준다. 일제 시대 항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비판의 영역 밖에 두고서 신성시 했던 천황제 제국주의 파시즘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내면성에까지 공권력을 개입시켜서 그의 정신과 영혼까지 장악하려 했다. 확실히 전근대 시대에는 사상, 표현, 학문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제약되어 있었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조선시대의 사문난적 사냥, 일제 강점기의 사상적 복종이 그러하다. 결국 인간의 내심까지 법의 규제가 작동된다는 것은 한국이 아직 근대국가의 초입에도 들어서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제 강점기의 국가 숭배 사상을 법제화한 것이 치안유지법이고 이것이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졌다. 이 법은 수사기관, 검찰이나 사법부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실제 국가보안법 사범은 대부분 제7조 위반이고, 제7조 2항은 찬양고무 조항이다. 즉 사상 통제가 그 존립의 실질적 의의라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방부는 군인 대상 금서 목록을 발표하였다. 7,80년대 식의 전국민 대상은 아니더라도 군인에게 헌법 상 보장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전체주의 사고방식과 관행이 부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좌익 교과서라고 규정한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강압적으로 개정요구했다. 정부가 표방하는 공식 역사 해석 외에 배우지 말라는 이 교과서 파동은 결국 냉전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주류 보수의 공식 견해와 다르면 좌파가 되고, 학생과 국민의 정신세계는 획일적인 사고로 채워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벌인 대대적인 자수·전향 공작은 일단 강제로 전향을 시킨 다음 국민보도연맹 조직에 가입시켜서 전향이 실질적, 내면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계속 감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70·80년대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정치범 사상 전향 공작의 경우 감옥의 수형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서 전향을 강요하였으며, 심사를 한 다음 전향 선언을 공개 발표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국가권력 밖의 개인이 존재할 수 없고 국민의 모든 정신세계를 완전히 제압했다는 것을 확인하려 한 것이다. 일제는 전향하지 않은 자들을 보호관찰소를 통해 출소 이후에도 사상을 계속 통제하려 하였다. 70년대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회유뿐만 아니라 폭력을 실질적으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고문까지 가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거부하는 사람은 자살하거나 사망하였다. 사상죄는 독방수감, 적은 식사량, 운동시간과 면회 제한 등 그 자체로 죽음이었다. 사상적 순혈주의, 국가에 대한 신앙고백 요구는 그 자체가 ‘문화적’ 폭력이지만 실제로도 폭력을 수반한다. 90년 국군보안사령부는 5·16 군사정변 직후 불순분자 예비검속, 한국전쟁 직후 국민보도연맹원 검속과 학살, 일제 말 군국주의가 구상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살해 계획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공안기관의 전체주의 관성이 다시 살아나 우리 사회는 90년대 초반 이전의 과거로 되돌아갔다. 국무총리실, 국정원, 기무사의 민간 및 여당 내 반대파들까지 사찰하고 이러한 행위들이 처벌받지 않은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 간첩 만들기 전쟁이 발발하면 내부 비판자를 적으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전형적으로 쓰던 방법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에 대한 처우가 훨씬 가혹했고 필요에 따라 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경찰, 수사정보기관, 검찰은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왔다. 민간인에게 봉사해야 할 집단이 민간인을 사냥하여 승진과 출세를 위한 먹잇감으로 삼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조현오 경찰청장은 성과주의를 도입하여 일하는 분위기를 정착시킬 것이라고 했다. 직후 양천경찰서에서 경찰의 가혹행위 고문사건이 터졌다. 보통 이런 날조는 실질적 증거없이 아주 작은 의심이 들어도 모든 것을 연결하여 큰 그림을 그리고 빨갱이, 관제 공산당, 간첩으로 만들어냈다.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하면서 국민에게 ‘적을 적발하는 것’을 부추기고, 불순분자나 간첩을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행태라 볼 수 있다. 이는 국민들 간에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고 고발하여 아무런 항변없이 공동체 밖으로 추방시켜 희생양을 만들고 모두가 입을 다무는 분위기로 만들었다. 국민들이 위축감과 공포에 의해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권력에 복종하게 되고 자신이 적 혹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공개 입증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는 것이다. 간첩 혹은 내란죄 조작은 일본 군국주의에서 전형적으로 자행되어 언론을 제압하고 국민의 충성을 유도하려 한 방식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일본에서는 사라진 이러한 간첩조작은 친일경찰과 이승만에 의해 지속되었다. 여순사건을 시작으로 사회주의 계열 관련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까지 모두 빨겡이로 몰았고, 일가친척 모두가 한통속으로 취급되어 패가망신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조작은 80년대 5월 17일 계엄령과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 고정간첩 등의 행위로 몰았던 사건인 5·18 광주민주화운동일 것이다. 이는 강경 진압의 근거가 되어 각종 학살이 자행되었다. 인위적으로 좌익, 간첩을 조작하여 좌익 탄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작업은 이미 정부 수립 단계에서 만연했다. 보도연맹 학살부터 지속적인 공산당 ‘제조’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이승만의 반대파라면 공산당이 되었다. 적이 없다면 적을 만드는 과정에서 국민은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특히 주로 간첩이 되었던 사람들은 납북어부들이다. 68년 이후 납북어부들의 월선행위는 고의성 여부를 불문하고 반공법 소정의 탈출죄를 구성한다고 판결하게 되었다. 수십 일 동안 구타, 고문을 가하여 북한 해상에서 월선 조업을 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어 처벌하였다. 정보과 형사들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극단적인 상호 감시 체제를 구축하여 국민의 일상을 지배하고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국가와 공동체 밖으로 내쳐버렸다. 심지어 북한의 대남정책 변경으로 남파간첩 검거 수가 적어지자 간첩을 ‘국가정책’으로 양산했다. 이러한 조작사건에서 국어로 자신을 표현할 능력도 없는 납북어부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심지어 조작간첩사건의 피의자들은 인혁당 사건처럼 자신이 속한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수사받으면서 처음 알게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작의 주체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피의자들만 사형, 고문 후유증 때문에 억울함을 풀기도 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내부의 적’은 진압과 토벌의 대상? 유신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1979년 말, 술마시다 홧김에 정부를 욕하고 대통령을 욕했다가 이웃의 고발로 반공법,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2,3년 형을 살고 나오는 사람들이 널렸던 시대였다. 이후 박정희의 후배 군인들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한 것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여 ‘토벌’하였다. 그리고 21세기 지금도 이러한 행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경찰은 적을 대하듯 시위대를 진압했다. 또한 경찰 개인에게 연행 성과급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민변의 변호사는 전경들의 방패로 얼굴을 맞아 두개골 골절 등의 상처를 입고 기절하여 쓰러지기도 했다. 2009년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잔당 소탕’이라는 어휘를 선택함으로써 시위대를 국가파괴의 적으로 간주했다. 2009년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도장 공장에 대테러 경찰특공대 2500명 투입하여 얼굴에 테이저 건을 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국가권력의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모습을 반증한다. 이에 대해 조현오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은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었고,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 23명이 자살, 질병으로 사망하고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21세기 문명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다. 10년의 민주정부를 거친 지금에도 민주화 이전의 잔재를 보고 있다. 경제를 살린다는 이유로 병사와 노동자는 도구가 되고 생명과 생존은 국가나 조직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최고 권력자와 공권력을 집행하는 당사자들과 우리 사회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를 쟁취하고 박근혜를 탄핵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국가폭력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재벌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고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 우리는 왜 도구만 되어야 하는가? 항상 국가와 조직을 위해 희생되야 하는가?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고질적인 국가관의 체득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일원인 국민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용산참사에 투입된 경찰특공대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 등 국제 행사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테러 진압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전술 등을 훈련받는 부대인데, 재개발 과정에서 강제 철거를 위해 철거민 진압에 동원되었다. 철거민이 테러세력이 된 것이다. 인민의 권리 보호는 안중에도 없는 일제 총독부 경찰과 군인이 한국의 경찰과 군의 모태가 된 데서 그 먼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해방 직후 장택상 도청장은 경찰이 기술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은 정치적 판단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폭력 수단을 거침없이 행사한다. 이들이 받는 상부의 지시는 살해명령이 아니라 단지 시위진압이라는 말뿐이더라도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좋다는 면허장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지시는 대통령과 최고지휘관의 포상과 처벌의 방침으로 내려왔다. 이러한 국민들의 경험은 우리가 대체로 경찰을 무서워하고 경찰은 국민을 적대시한다는 것을 내재화해버리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오죽하면 한국전쟁 전후 산간 오지의 주민들은 경찰을 ‘산골 대통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경찰에게 법이나 행정 절차는 아무 의미가 없고 거의 무한대의 권력이 주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집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도 안하고 곧바로 초가지붕에 불을 질러 노인이나 병자가 타 죽은 사례도 있다고 한다. 21세기의 경찰 진압은 이렇게 흘러왔고, 민간인 보호 지침 없이 시위진압과 함께 전과의 압박이 명령으로 내려오면 결국 그 과정에서 발생할 불상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이 지어지지 않아온 것이다. 이러한 전과 보고를 위해 민간인을 학살하고 공비로 보고하는 것이 다반사였던 역사가 있다. 여기서 국민은 간첩으로써의 희생양과 더불어 작전 편의와 성과 달성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잔혹행위에 대한 경고없이 단지 성과를 중시하고 칭찬한다면 이렇듯 국민의 생명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결국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무리한 진압작전의 책임은 말단 지휘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 즉 대통령에게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근거로, 지금까지 처벌을 피해 온 말단 지휘관들은 죄가 없고 오직 모든 악의 근원이 대통령에게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적폐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고 일원적인 것일까? 다수가 하달받은 명령 그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보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전범재판처럼 당시 국가폭력을 자행했던 대통령 휘하 모든 수족들에게 죄를 물어야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이지 않을까? - 보복, 응징의 주체로서의 공권력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죄를 미워하라 했다. 그러나 죄가 아닌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수사기관의 표적수사는 정치권과 검찰과 재판부의 보복적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신체적 고문 없이 잠을 안 재우거나 회유와 은근한 협박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며 진술을 얻어냈다. 이는 소고기 수입 문제를 다룬 PD수첩 제작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역사는 70년대 김지하 시인이 인혁당의 고문조작을 폭로해서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구속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80년대까지 통틀어 보복의 주체는 중앙정보부였다. 이렇듯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표적인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목적이 늘 수반되어 있었다. 결국 ‘법의 집행’이 아니라 ‘응징’의 원칙에 서게 되면 학살과 강간, 무차별적인 파괴는 거의 불가피해진다. 마치 적을 제압함으로써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작동하면서 공권력으로써는 아주 잔인하지만 유치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잔혹성은 근대사회 들어서 약화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제주 4·3사건에서 보도연맹원 학살과 인민군 부역자처벌, 지리산 일대 토벌작전에서 근대 이전과 유사하게 재연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공권력의 개인에 대한 고소 향연을 보기가 쉽다. 이들의 논리는 결국 모든 정부 비판이 명예훼손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미국은 공직자의 명예훼손에 대해 상황을 엄격히 제한했다. 특히 2009년에는 2006년에 비해 경찰 모욕죄가 4배를 훨씬 넘었고 시위자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여 훈방 혹은 조사 후 즉시 석방의 관례를 깨고 48시간을 채워 내보내면서 촛불시위 참가 자체에 부담을 느끼도록 응징하였다. 국민이 왜 경찰을 신뢰하지 않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화풀이성 발언에 대해 모욕죄를 적용하여 처벌하는 것은 단지 보복성 처벌일 뿐이다. 상식적인 형벌의 기준에서 보아 지나치게 가혹한 법 집행이나 강자가 약자를 고소·고발하는 것은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보다는 피의자를 완전히 무력화하여 최소한의 비판 의지까지 꺾어버리려는 점에서 보복에 가깝다. 이러한 방식이 민주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권력의 신종 대응양식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의 한국은 여전히 법이 아니라 권력자의 의지와 보복 감정이 다스리는 나라에 가깝다. - 공권력의 반인륜성 : 함정수사, 프락치 공작, 기망 함정수사는 수사기관이나 수사기관의 위장 정보원이 범죄를 교사한 후에 그 실행을 기다려 범인을 체포하는 수사 기법을 말하는데, 지금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에게 범죄를 유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국민을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것으로서 잘못하면 공권력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마약, 성매매, 조폭 수사처럼 범죄 내용이 노출되지 않는 경우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찰을 달랐다. 지인을 시켜 북한 관련 발언을 하도록 유도하여 1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작을 한 다음 제보하도록 하여 연행 후 폭행하고 북한 찬양을 자백하게 하는 공작을 수사 실적을 올리기 위해 함정수사를 통해 꾸며낸 것이다. 유신 시절 이러한 일은 아주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후 경찰과 군이 공포에 떠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좌익 동조자를 가려내기 위해 이러한 함정수사를 이용하기도 했다. 제주 4·3사건 당시에 무장대로 위장하여 협조하는 주민들을 바로 총살하는 것이 함정토벌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심지어 함정토벌을 알아보고 넘어가지 않으려는 주민들까지 총살했다. 1차 학살 후 살아남은 사람마저 죽이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은 일어서면 살려주겠다”고 한 다음 일어서면 총살하는 기망까지 저질렀다. 80년대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특별 관리하기 위해 일부를 회유하여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기도 하여 동료를 배반해야 하는 고통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연대 학생 정성희가 강제징집 후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학생운동 관련 활동 진술을 강요받고 프락치 활동을 요구받아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건들은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기 이전까지 군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영화 실미도의 그 부대가 부사관 임용과 미군부대 취직을 빌미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중형수들에게 공작 활동을 맡긴 것은 실제 역사이다. 애초에 이러한 약속은 수감자라는 신분에서 지켜질 수 없었고 그들은 그저 민간인의 신분인데다 기만적인 약속임을 군 측도 알고 있었다. 4·3사건과 한국전쟁 때도 자수 권유를 통해 건준위나 인민위 참가자를 색출하여 모두 집단 총살했다. 생존을 위해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한 것을 일말의 배려도 없이 자국민을 기만적인 방법으로 색출하여 살해한 것이다. 강원룡 목사는 “재빨리 피난을 간 사람은 애국자가 되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용공분자나 부역자가 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단군 이래 공권력이 국민들에게 한 최대의 거짓말은 바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선 공권력의 보복성 살해와 기만적인 모든 방법들이 그 사건에 총집합해 있는 것이다. 전쟁 시기라 하더라도 공권력은 범죄조직처럼 행위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부도덕성은 비판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적 혹은 잠재적 적으로 보는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러면 무고한 국민도 피해자가 되고 노리개로 취급되는 것이다. 2장 국가폭력의 유형과 그 피해자들 “….전쟁은 이제 지배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도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라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다” - 조지 오웰 군사정권 시절 고문당한 사람들 중 일부는 곧 사망했고, 일부는 정신병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갔다. 당장 죽음은 면했더라도 이후 평생 병마와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목사가 되었고,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정형근은 국회의원 3선을 거쳐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 이사장을 역임했고, 김경한 검사는 이명박 정부의 법무부장관이 되었다.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최고 책임자 전두환과 그의 자녀들은 아마 수천억의 돈을 숨겨둔 채 천수를 누리고 있다. 김근태와 같은 민주화운동가들은 고문 사실을 폭로하고, 글이나 책으로 세상에 알릴 수도 있었으며, 이후 국회의원이나 장관의 지위까지 얻었다. 그러나 지식층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하층민 출신의 고문 피해자, 학살 피해자, 공권력 폭력 피해자는 자신을 죽음 직전으로 몰아넣은 사람들 앞에서 욕을 퍼붓기는커녕 가족과 이웃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서서히 그리고 매일 죽어갔다. 이들 평범한 시민들의 피해 사실은 묻혀갔다. 공권력 피해 일반의 실태, 고문당한 사람의 수와 고문의 정도, 출옥 이후의 치료 기록, 사망과 정신병에 대한 의학적인 진단 기록조차 제대로 정리,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재해, ‘피해’와 ‘운수 탓’의 애매한 영역 인간의 각종 피해와 고통의 원인은 대부분 정치사회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은 오히려 정치사회적 원인으로 더 확대되거나 정치나 제도에 의해 최소화되기도 한다. 실제 자연재해와 인재의 구별은 쉽지 않고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마치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 가해는 ‘자연적 욕구’에 의한 것으로 변명되고, 피해는 ‘여성의 행동거지 잘못’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80년대 위험한 산업현장에서 심각한 산업재해를 당해도 사용자의 잘못이 아닌 노동자 자신이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거나 운이 나빠서라고 자포자기 했다. 지금도 상당수의 산업재해는 제대로 신고, 집계되지도 않고 피해자가 불만과 항의를 강력히 표시하면 사용자가 적당히 돈을 주어 무마하고 산재 신청을 못 하도록 한다. 군대또한 마찬가지이다. 군사정권 시절까지 한국 군대는 병사들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는데 국민방위군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맞아 죽어도 항의할 데 없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처럼 군대는 인권의 사각지대였고 마구잡이 구타나 폭력이 자행되던 거대한 수용소였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이 전투 상황도 아닌 평화 시에 군대 가서 목숨을 잃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자살한 군인 또한 국가의 책임이다. 휴전 이후 2005년까지 적어도 1개 사단 병력 규모 이상의 군인들이 비전투 상황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심지어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명박 대통령은 군 내 사고는 “체벌보다도 자유롭게 자란 아이들이 군에 들어가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 휘하 군 관련자들까지 병사들의 나약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군 자살은 군인이라는 지위, 군 복무와의 연관성 없이 발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군대 내의 가혹행위나 부조리, 학대 등으로 자살이 방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대다수는 군에 가지 않았다면 살아서 가정과 사회의 주역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이런 시선에서 군인 자살은 ‘안보재해’로 봐야하는 시각이 등장했다. 결국 대부분 모든 재해는 정치사회적 재해라는 것이다. 힘있는 자들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기를쓰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집회에서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고엽제 피해자들도 사실 상 그 당시 박정희 정권에 보상금까지 조국 근대화를 빌미로 떼이고 악성 질병들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피해자들이다. 97년 한 고엽제 피해자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미국 법원은 소송당사자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한국 정부도 국가유공자라고 거창하게 예우해주는 것 같지만 힘없는 국민들에 대한 국가의 실제 태도는 그 반대다. 현행 국가유공자법에 따르면 군에 입대하여 자살한 경우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 책임을 모두 개인으로 돌리는 논리다. 하지만 앞서 군 내 자살은 상당 부분 국가 책임이지 결코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해와 고통은 대부분 주권 상실이라는 큰 원인에서 왔고 이는 이후 분단과 대립, 좌우 갈등, 전쟁 등 국제적·국내적 긴장과 갈등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 자연재해인 것이 없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대량 살상과 고통에 대한 책임자인 남북 양국은 잘못이 없는 것처럼 공식화되어왔고, 양민 학살이 아닌 전쟁 피해로 간주되어왔다. 더불어 한국전쟁 당시 미군폭격에 대해서도 우방국 미국을 비판할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 1차 피해 : 국가폭력의 백화점, 대한민국 국가폭력의 1차 피해는 국가의 직접 가해로 인한 물리적 피해, 2차 피해는 그 후유증, 정신적 고통, 가난, 이혼 등으로 인한 피해, 3차 피해는 가해세력이 폭력을 부인하거나 사실이 밝혀져도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 등 정치사회 상황의 지속에 의해 발생한 모든 고통을 지칭한다. 진상규명 자체에 대한 국가의 탄압, 혹은 가해 당국의 공개적 부인과 자료의 은폐 시신 탈취, 정부의 허위사실 유포, 사건 조작, 언론의 묵살과 사회의 관심 등도 여기에 속한다. 정말 많은 사건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면서 모든 피해 사실을 목도할 수 있었고, 여기서 그 누구 하나 가해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48년 이후 한국은 아마 20세기 여러 나라 중 가장 많은 자국민을 고문으로 고통 받게 한 국가이지 않을까? 한국 정부가 저지른 학살과 사법살인, 고문은 반인도적 범죄의 구성 요건인 “특정 집단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공격”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이는 1000건이 넘는 간첩 조작 사건도 포함한다. 사상범들은 이미 감옥에서 수십 년의 형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처벌을 받는 셈인데도 정신까지 완전한 항복을 강요당하면서 매일 구타와 폭력에 시달렸다. 이들은 형 만기 혹은 출옥했다가 사회안전법의 족쇄에 걸려 또 다시 20년 이상 감옥에 구금되어야 했다. 세계 최장기수가 바로 대한민국의 고 김선명 씨가 45년의 형을 살았고 이는 여타 국가들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다. 80년 신군부의 삼청교육대 또한 국가폭력이 무조건적으로 행사되던 법 외의 지대였다. 6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남녀 구분없이, 노조간부까지 뚜렷한 범죄 증거 없이 잡아들여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 사망에 이르게까지 했다. 고통에 못이겨 음독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 검거나 분류 심사, 순화교육과 근로봉사 과정에서 불법구금, 강제 노역, 군사재판 회부 등으로 피해자들을 비인도적, 굴욕적으로 취급하였으며, 국제적인 인권 기준에 부합하지 않음은 물론 정권 유지를 위한 국가권력의 범죄행위임이 확인되었다. 한국전쟁 초부터는 거리와 집집마다 청년들을 수색하여 강제징집했다. 이후 군번을 부여하지 않거나 부상을 당해도 군인 신분이 아니어서 민간 병원에서 치료받기도 했고 신념이나 정치적 의사와 상관없이 모두 군인이 되었다. 여기에 길거리 학생이나 청소년도 포함되었다. 이후 강제징집의 대상은 주로 전두환 정권 초기 학생운동 관련자들이었다. 한편 북한에 간첩으로 침투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결과적으로 소모품 취급당한 북파공작원들도 많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넘나들었던 사람들은 존재를 부정당하다가 정부가 인정하면서 사망, 실종자 수가 8천 명에 이르는 것이 공개되었다. 훈련 또한 가혹한 구타가 동반되었고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가혹한 행위나 살해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애초부터 법적 근거 없이 인간 병기로서 북파공작원을 양성해서 월북시켰고 이들을 이용하고 헌신짝처럼 버렸다. 결국 이들은 사형당하거나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민주화 이전까지 주로 전쟁 전후의 월북자, 피학살자, 이산가족,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사찰과 감시가 이루어졌다. 도청, 감청, 사건 조작, 폭력과 고문, 협박, 부인 등의 통상의 범죄조직과 비슷하게 활동한 경찰, 군,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위협,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공안기관 요원들은 “한번 좌익은 영원한 좌익”이라고 반복하면서 지금까지도 감시·사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어지던 사찰은 90년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드러났고 김영삼 정부는 사찰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김대중 정부에도 경찰이 안기부 지시 아래 각계 인사와 사회단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인물과 단체 자료를 작성,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이 고질적으로 겪어온 전쟁과 분단을 기반으로 관련된 이들을 사찰하고, 군사정권 아래서는 관할 경찰의 계속되는 방문과 동향점검, 심지어 동네의 이웃을 정보원으로 두고 생존기간까지 계속 감시한 점으로 보아 매우 억압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사찰과 감시는 이명박 정부 당시, 쌍용차 노동자 파업 현장에서 민간인을 사찰하면서 부활했다. 불법 사찰의 내용은 이명박 대통령에까지 보고되었고, 청와대가 사건을 덮기 위해 범죄조직에서나 사용하는 대포폰까지 지급하는 일들도 드러났지만 검찰은 더 조사하지 않았다. - 2차 피해 : 국가폭력 이후 계속되는 고통 가장 대표적인 2차 피해는 가족 구성원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면회 등을 다니거나 진상규명을 위해 뛰어다니다가 생활 기반이 파괴되거나, 가정이 파탄되는 일이다. 인혁당 사건이나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구금, 구타, 사찰이나 노골적 차별과 사회적 배제의 피해도 있었으니 결국 1차 인권침해이기도 했다. 특히 갑오개혁 당시 폐지되었으나 일제 치하에서 사실상 부활하고 해방 후 분단체제에서 그대로 지속된 연좌제가 이러한 2차 피해에 속한다. 특히 국민보도연맹 피학살자의 가족들이 대표적인 연좌제의 피해자들이었는데, 일상적 사찰과 감시, 취업과 승진 및 해외여행에서 구조적 국가폭력에 의한 차별을 당해왔다. 이들을 포함해 조작간첩, 의문사, 고문 등의 피해자와 5·18운동 참가자의 가족들과 지인들까지 셀 수 없는 국민 대다수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겪는 또 다른 고통은 살아있다는 그 자체에 대한 죄책감과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움이다. 정신적 질병 또한 권리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조차 박탈해버리며 피해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저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한 진상규명 등의 작업들은 남은 유족들의 몫이며 이런 작업들은 가정을 파탄나게 한다. 결국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남은 또다른 국가폭력 피해는 가난일 것이다. - 누가 주로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나 누구보다도 법을 잘 지키고 국가에 충성하는 모범적이고 평범한 시민인 나와 내 가족은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될 수 있다. 특히 남한에서 구조적으로 외부자나 경계인이 되어 국가폭력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반체제운동가, 단순한 민주화운동가들을 시작으로 군경 피학살자 유가족, 월북자 유가족, 재일동포와 60-70년대 독일 유학생들, 납북어부, 북파공작원들은 2등시민이거나 시민으로조차 대접받지 못했다. 노조 활동가와 철거반대 활동가들은 위험한 사회집단이었다.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 사회운동가를 비롯하여 한국전쟁 시기 이래로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 똑똑한 사람, 조직에서 바른 말 하는 사람도 ‘빨갱이’가 되었고 학살을 당하거나 일가친척까지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재일동포들은 일본 역사의 일부이면서도 쫓겨났고, 한국 역사의 일부이면서도 잘려나간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결국 그동안 국가폭력의 표적인 된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편협한 기준이 아니라 정치 문제에 관심이 없던 일반인이 더 많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 중 대부분 음주 대화나 수업 중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비판한 경우였다. 결국 정부는 정치, 사상적으로 위험한 사람을 처벌한 것이 아니라 로익 바캉이 말한 것처럼 사실상 가난한 사람을 처벌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뿐더러 그 적폐가 제대로 청산된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 중 누구나 국가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정치에 관심없는 일반인이라면 더욱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3장 외면하는 국가, 응답 없는 국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 과거를 바르게 알면 과거를 청산할 줄 알고 이는 현재와 미래의 힘이 되지 않을까? - 부인 : 거짓 발표, 은폐, 날조, 증거인멸 최종길 교수, 신호수, 이윤성 사건은 모두 진상규명으로 거짓임이 밝혀졌다. 국가는 인권침해나 잔혹행위 발생 사실이 알려지면 일단은 거짓 발표를 하거나 증거를 인멸하고 사건이 공개되어 문제가 되면 은폐와 부인, 증거 인멸, 날조 등을 시도한다. 이 점은 모든 국가범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심지어 긴급조치 아래에서는 정부와 언론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서는 처벌은 커녕 문제제기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증거 인멸과 은폐의 대표적 사례는 김훈 중위 사건이다. 자살로 발표한 이 사건은 아직 군 수사기관의 부실초동수사로만 결론내어지고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가족 동의없이 시신을 부검하거나 화장해서 없애버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사인을 조작하기 위해 흔히 쓰이는 방법으로, 강제로 부검 동의서를 유족들에게 받기도 하고 심지어 유족의 도장을 임의로 만들어 부검 동의서를 작성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날조는 2009년 용산참사에서도 동의 없이 부검을 끝내버렸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한 다음 시신을 불태워 없앴다. 토벌작전 때에도 민간인의 귀만 잘라 증거로 제출하고 나머지 시신은 없애버렸다. 한국전쟁부터 용산참사까지 당국의 해온 짓들은 범죄자의 증거 인멸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최종길 교수 사건 또한 진상규명을 하지 않는 대가로 보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혹이 너무 커서 유족이나 시민사회의 항의가 빗발칠 경우에 가해 측인 국가가 수사나 재조사에 응하기도 했는데 정의구현사제단의 고발에 따라 최종길 교수 의문사를 수사했으난 이러한 수사는 애초에 합법적 은폐와 정당화의 수단이 되었다. 결국 가해자가 자기 자신을 수사하는 꼴인데, 어떤 공권력이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겠는가? - 해석적 부인 또는 덧칠하기 진실이 드러나도 국가는 이리저리 변명하며 회피하기 바쁘다. 상황이나 불가피함을 내세우면서 책임을 북한에, 산업화에, 심지어 피해자에게 넘기기도 한다.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미군폭격을 미군이 “보급품 집적소 폭격”이라고 변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앞선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바로 적으로 규정되어 학살되고 모두 난동자, 간첩, 통비분자, 폭도의 이름으로 처벌을 정당화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적 부인’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 대표적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인데, 난동과 혼란 등으로 사건 자체를 부인하다가 “전투는 있었으나 학살은 없었다.” “자신들에 의한 오발” 등으로 ‘해석적 부인’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민간인 사찰 대상자 김종익의 유죄 증거를 못 찾자 ‘노사모 핵심’이라고 거짓 지목을 했다. 이러한 극렬, 좌경 지목으로 증거 부족을 매우려 한 행태는 반복되어 왔다.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해석적 부인은 주로 교과서나 미디어를 통해서 신화를 만들어낸 다음 기억을 조작·굴절시키는 것이다. 국가는 기억을 과장, 조작하고 자신과 현재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사에서 교훈을 이끌어낸다. 전쟁의 영웅담은 가장 흔히 조작되는 사례다. 또한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은 언론과 국가가 만들어낸 신화 중의 하나다. 국가 차원의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날조는 교과서를 왜곡하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은 기본적으로 한국전쟁 및 군사정권 과거사에 대해 부인과 날조로 일관하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교육부는 뉴라이트와 합작해서 또 다시 왜곡의 역사를 반복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등을 삭제하고 군사독재를 ‘독재화’라고 애매하게 표현하려 했다. 이것은 일본의 뉴라이트, 즉 자유주의 사관이 일본군 ‘위안부’ 를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것과 동일하다. 우익이나 가해자 측은 더 황당한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역공을 한다. 혹은 일부의 사실은 인정하되 해석적 차원에서 공산주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 인민군의 짓이라던가, 제주 4·3사건이 폭도들이 저지른 짓이라는 주장이 이에 속한다. 정치권력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실을 은폐, 날조하고 기록을 파기하고 공개를 차단하고 학교·언론·법원이 이러한 조작된 기억을 유포하거나 날조된 진실을 정당화해도 현장 생존자의 생생한 증언까지 뒤집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자의 목소리를 묵살하거나 아예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기다린다. 마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대하는 일본정부의 태도와 같다. 민주화 이전의 사건들은 모두 짓밟고 구속, 협박, 고문하여 은폐되었으나 민주화 이후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지니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고 결국 불가피하고 정당한 작전이었다는 해석의 고지를 선점하려 한다. -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21세기 들어서도 인간 존엄성 말살 사건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우선 그 전에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나 국가 당국이 그것을 전혀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안 기름유출사고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힌 책임자인 삼성중공업은 가해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하고 보상액을 줄이려 했으며 심지어 보상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복구지원금이나 지역발전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돈을 쥐어줬다. 더불어 사법부에서도 삼성의 손을 들어줬고, 자연 생태계 파괴로 인한 피해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대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들이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과적으로 국가는 구경꾼이었으며, 거대 기업의 막강한 힘이 작용하는 동안 주민들은 경제적·정신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130명의 자원봉사자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책임지는 주체는 아무도 없다. 정말 많은 사건들 속에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아무리 국가기관이나 대기업 등 거대 조직의 잘못에 의한 민간인 피해 사실이 들추어져도 구체적인 정책 결정, 지휘 명령 선에서 누가 책임이 있는지 규명되지 않는다. 최고 권력자 혹은 국가기관이 가해자들과 사실상 한편이라서 ‘자기사면’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51년 거창 민간인 학살의 명령자인 군인들이 이승만의 직접 서명이 있는 친서를 통해 사면·복권되거나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이 공권력이 서로를 보호하며 숨겨주는 데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미군 관련 피해사건들 또한 마찬가지라서 미선·효순 양 사망사건이나 노근리 학살 등이 그러하다. 식민지적 무책임인 것이다. 국가가 없고 주권이 없으면 민간인의 생명권 박탈과 재산의 상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모두 자연재해나 운명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된다. 결국 약육강식 논리의 야만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누군가 확실히 책임소재가 있는 인재이다. 현재 사회에서도 기업의 정리해고나 무리한 4대강 공사 강행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도 책임이 있는 누군가의 지시를 통해 일어난 인재이다. - 반성과 사과가 없는 권력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실에 대한 최대의 책임자는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이완용이나 을사오적만 기억하고 있다. 왕이 신성하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기 때문에 무책임하다고 할 수 없다. 역대 대통령들이 그러하다. 국민들을 버리고 가면서 거짓 방송을 한 이승만도, 인권침해적인 과오들을 북한의 존재로 정당화한 박정희도, 광주 학살이나 의문사 등에 책임이 있는 전두환, 노태우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광주 시민들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법계에서도 또한 물리력을 소지한 현실 권력에 신성성을 부여하여 사법 심사의 대상에서 배제한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권력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반성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심지어 모든 과거사 관련 입법에서 배상이라는 용어 사용을 기피하였다. 정당한 공권력 행사 과정에서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책임한 집단은 검찰이다. 게다가 억울한 이들의 소송에서 피고인 검찰은 항소, 상고를 지속하면서 아픔을 빨리 잊고 싶은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짓을 저질러 왔다. 또한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헌재의 결정에 불복하고 각종 재심사건에 대해 이의 제기하고 항소해왔다. 죄의식과 도덕의식이 거의 마비된 것이다. 과거에 국가권력이 저지른 문제를 폭로하면, 국가가 아닌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공권력의 잘못이 폭로되면 그들은 애국이나 안보같은 것으로 변명하고 자기정당화 한다. 사실 상 모든 가해기관의 말단 직원들 또한 토사구팽당했음에도 애국했다는 합리화로 비참한 말로를 가리려 한다. 혹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기보다 간첩을 잡았다는 업적을 치켜세우기까지 한다. 내부 혹은 외부의 비판은 결국 국론 분열로 몰아붙여진다. - 사체유기, 무관심. 조사 방해, 탄압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나 유골은 정중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최소한 유해를 인도하기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실미도 사건’ 유족들이 사살되거나 처형된 피해자들의 유해를 인도받고자 했으나 정식 군번을 받은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신 수습을 외면했다. 국가의 사체 유골에 대한 방치는 식민지 강제동원 피해자, 한국전쟁 시기 미군 피해자, 더불어 자국군이 자국민을 도륙했던 양민학살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피해 사실 자체에 무관심하거나 아예 진상규명을 방해하기도 했다. 결국 65년 한일협정은 일제 식민지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말살했다.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과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노근리사건 또한 여론의 등쌀에 마지못해 조사했으나 미군은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지어버렸다. 더욱이 유족들의 진상규명운동을 반국가행위자로 만들어 탄압하기도 했다. 국가 지시로 무덤과 위령비를 없애기도 했고, 마음대로 유골을 파내어 소각해버리기도 했다. 최소한의 인간의 본성도 잃어버리는 국가권력의 역사는 2015년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져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의 시신탈취 행위만 보아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준 가해기관으로서의 언론 언론은 사회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되기도 하고 진실을 묻어버리는 역사 앞의 반역자가 되기도 한다. 그 중에 모든 국가폭력과 심각한 인권참해사건에는 언제나 권력과 자본에 추종하는 언론의 외면과 편파·왜곡 보도가 있었다. 특히 전쟁 혹은 파시즘과 군사독재 아래서는 언론과 지식인의 발언이 통제되기 때문에 언론 자체에 독자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이 경우 언론은 사실 상 정부의 선전매체 기능을 했다. 그래서 검찰이나 사법부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파시즘이나 독재에 부역한 책임을 슬그머니 면죄받는다. 그러나 당시 언론의 논조를 보면 수동적으로 정권의 방침을 따르고 비판을 하지 않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사실상 바람잡이의 역할, 즉 공안기관이 개입하거나 검찰이 수사를 하도록 여론을 조작하는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파업, 학생운동, 시민운동 등에 대해서 험담을 퍼붓고 공격했다. 중정이나 검찰의 사건에 대한 사전 공표를 그대로 받아쓴 언론은 대중의 의식과 행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사실상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 권력의 한 주체의 역사를 지녀온 것이다. 국가폭력 하수인 역할은 이미 1948년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언론 통제로 학살 관련 사건도 보도될 수 없었다. 더불어 이후 조작간첩사건,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 등 수많은 정치적 조작사건을 중정의 뜻대로 충실히 보고하면서 피해자에게 한 번 더 폭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것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성을 넘어 불법적·반인권적인 공권력 행사의 가장 적극적인 부역행위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무죄로 밝혀진 것 또한 언론은 사과하지 않고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는다. 또한 유신정권과 5공 정권을 찬양하였던 지식인들 역시 사회적 처벌을 받은 바 없으며 자기반성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에도 언론의 입장은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학살 피해자들이나 의문사 사건의 유족들의 호소에 일절 반응하지 않거나 보도를 기피하는 등, 지난 역사를 권력자의 선전 및 선동의 수단이 되고 학살과 인권침해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방조함으로써 국민의 알 권리를 제약하고 인권침해사건이 창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장한 준가해기관이었다. - 피해자 입막음용 ‘보상’ 국가의 잘못된 공권력 집행이 발생하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가해자가 누구이며 법적 책임은 없는지가 밝혀진 후에 합당한 보상이나 배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국가기관의 가해 사실, 피해의 정도, 가해의 성격과 의미가 충분히 확인도 되지 않았는데 서둘러 보상 조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피해 문제가 공론화되어 가해자 처벌, 피해 보상액 증가 요구가 비등할 것을 가해자 측이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노태우 정권의 광주보상법 날치기 통과나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정책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의식 있는 피해자들은 이러한 방식을 거부할 수있지만 곤궁한 대다수 하층 출신 피해자들은 보상을 거부하기 어렵다. 일단 받고 싸워보려 해도 액수는 생활 여건의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정부는 보상금 지급 완료를 빌미로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보상금 신청 과정에도 브로커 개입이나 피해 부풀리기로 허위 보상금 신청 때문에 관련자들이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는다. 결국 보상조치로 문제를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가해 책임자들로 구성된 정부의 방침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할 능력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유족 피해자들이 결합되어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광주항쟁을 통해 보상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들의 권리의식을 자극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지만 앞선 이유로 피해자들 간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나쁜 결과를 낳았다. 결국 대부분의 사건들이 정부의 진정한 사고와 진상규명 없는 보상정책, 개인보상 위주의 정책으로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역사들이 많이 남아있다. 민주화 공로자나 공권력 피해자를 단순한 보상의 수혜자, 개별 민원인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가장 나쁜 보상정책이고, 생존의 위기에 몰린 그들로 하여금 굴복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실 국가가 희생자의 인간적 자존심을 뭉개는 일이다. 국제 관계에서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하는 일본 정부의 보상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보상은 피해자들의 경제적 처지를 제대로 회복시켜주지도 못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지도 못한 채 이들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뭉개고 저항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돈을 주었으니 이제 부담 주지 말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바로 우리 정부라는 것이다. - 정치화된 정의, 굴절된 정의 죄를 지은 사람이 처벌당하지 않고 그 하수인이 대신 뒤집어 쓴다면 결국 앞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을 희생양으로 생각할 것이다. 또한 이 면죄부는 재판 자체의 신뢰, 즉 국가의 포상과 처벌의 모든 과정, 더 나아가 국가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가져온다. 2차대전이 끝나고 전범처리에서 미국이 일본을 비호하면서 벌어진 정의의 국제적 몰락은 일본 내로 옮겨왔다. 이후 동아시아의 전후 정의의 수립은 완전히 뒤틀리고 말았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친일 부역자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반공국가의 기둥으로 삼고, 일본 책임에 대응하지 못했고 심지어 박정희는 굴욕적인 협정을 맺어버렸다. 일제 식민지에서 한국인 희생자들은 남의 나라, 남의 왕을 위해 죽고 모국의 위로도 받지 못하는 참담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해자 처벌,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승리자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 국가의 범법은 제대로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온 사회를 뒤틀리게 만든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진실이 완벽하게 규명되어도 그것을 진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광주항쟁처럼 나름 성공한 과거 청산의 경우에도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는 멀쩡히 살아서 천수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정부가 진실화해위 등을 설립하여 인권침해나 학살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려 했지만, 국가기관의 의지 부재, 정치세력의 판도나 인식의 한계 때문에 여전히 과거 청산 작업이 굴절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것은 국가나 기존 정치세력이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려는 데서 주로 기인한다. 그래서 공권력의 불법 집행이라는 말보다는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피해로 보게 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중에 나온 기무사 문건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바라보는 역사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직 공권력이 진상규명을 위한 진정한 의지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희생자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공권력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을 마치 뜻밖의 재난이나 공권력의 정당한 집행 과정 중의 희생자로 보는 것은 그러한 사건들을 중대한 인권침해 혹은 학살로보지 않으려는 한국의 국가, 지배층의 시각이 깔려 있다. - 요약 : 지속되는 국가폭력 민주화 이후에도 갈등의 양상. 특히 공권력의 살인적 진압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저항세력에 대한 공권력 행사와 사건 후 처리 방식은 지난 6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1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청년담론 회원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소소한 모임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매번 같은 세미나에서만 얼굴 보는 사람들 말고, 더 다양한 청년담론 회원들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모임입니다. 11월 커뮤니티 데이에 참여해주세요! 일시: 11월 25일 일요일 오후 2시30분 장소: 연남동 맥주집 '행운을 빌어' 참가비: 2만원 문의: 010-2234-3789 1) 폭언 사건에 대한 경과보고
<푸코의 권력이론> 세미나 단체카톡방에서 있었던 폭언 사건에 대한 청년담론의 입장을 공유드립니다. 1. 지난달 푸코 세미나 과정에서 A와 B는 주제에 대한 의견대립이 있었고, 이는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2. 세미나 이후, A는 B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을 포함한 폭언을 단체카톡방에서 쏟아내고 단체카톡방에서 나갔습니다. 이에 B는 청년담론 운영진에게 사건에 대한 해결을 요청했습니다. 3. 청년담론 운영진은 세미나 과정에서의 논의는 언제든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도, A가 세미나 이후 공개적인 공간에서 폭언을 했다는 점은 사과해야 할 내용이라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4. 청년담론 운영진은 A에게 B와 세미나구성원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문을 요청하였으나, A는 거절하였습니다. 5. 이에 청년담론 운영진은 A에 대한 1개월 활동정지와 사과문 작성 요청을 재차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A는 이를 거부하고, 청년담론을 탈퇴하였습니다. 이상이 사건 경과에 대한 보고입니다. 청년담론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있고 또 다양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서로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고, 또한 매 세미나마다 일치하는 의견을 도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되는 것이 보장되면서 상호 발전적이며 성장할 수 있는 세미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청년담론 운영진은 본 사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이후 세미나 팀장들과 함께 청년담론 세미나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규칙들이 필요한지 논의하려 합니다. 본 사건으로 청년담론에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세미나 과정과 규칙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그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먼저 세미나 진행 중 불만이나 문제제기는 세미나 팀장에게 직접 이야기하거나, 청년담론 홈페이지에서 contact us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후 세미나 팀장의 주관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세미나 구성원들과 소통과 평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청년담론은 회원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세미나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원들께도 상호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토론이 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2) 청년담론 2018년도 하반기 사업 공유 1. 국가보안법 피해자 인터뷰 펀딩 사업 -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실천적 세미나 이후,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국가보안법 피해자 인터뷰 펀딩’ 사업을 진행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 내용을 공유하면서, 한국사회 구성원 모두가 실질적인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공감대를 확산하고자 합니다. 2. 대안대학 만들기 프로젝트 - 서울시가 주관하는 어웨이크 공모전에 ‘대안대학 만들기 프로젝트’로 지원했습니다. 당선 이후엔 청년담론이 직접 대안대학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진행합니다. 결과 발표 이후 더 자세한 내용을 공유드리겠습니다. 3) 청년담론 11월 커뮤니티 데이 공지 - 청년담론 회원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소소한 모임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 매번 같은 세미나에서만 얼굴 보는 사람들 말고, 더 다양한 청년담론 회원들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모임입니다. 11월 커뮤니티 데이에 참여해주세요! 4) 현재 진행 중인 청년담론 세미나 현황 - 각 세미나는 진행 중이지만, 청년담론 회원들은 무료로 언제든지 중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010-2234-3789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 진행중인 세미나 목록 - 푸코의 권력이론 - 주디스 버틀러 함께 읽기 - 가상대학만들기 프로젝트(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채효정) - 페미니즘 입문(젠더와 사회) - 퀴어 이론 |